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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로마의 콜로세움.

관주 觀周 2008. 6. 1. 09:37

 

 

 

27. 로마의 콜로세움 [Colosseum] 

 

 

 

 플라비아누스 황제 때 세워진 것으로 원래는 플라비아누스 원형경기장이라고 불렸다. 70~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공사를 시작해

80년 티투스 황제 때 100일간의 경기가 포함된 제전을 위해 공식적으로 헌정되었다. 82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최상층을 덧붙여 공사를 완성했다.

  

 

 

 콜로세움의 야경콜로세움(Colosseum)은 고대 로마 시대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로마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원형 경기장이다.
콜로세움은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아)의 정원에 있던 인공 호수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정식으로는 ‘플라비우스 원형극장(圓形劇場)’이라고 한다. 플라비우스 왕조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중세에는 ‘거대한 건축물’이란 뜻으로 쓰였다. 제정기(帝政期) 로마의 복받은 로마 시민의 오락시설로서,

여기에서는 글라디아토르(劍鬪士)의 시합, 맹수연기(猛獸演技) 등이 시행되었다.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이고, 외벽(外壁)은 높이 48m로 4층이며, 하단으로부터 도리스식(式)·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의 원주(圓柱)가 아치를 끼고 늘어서 있다. 내부는 약 5만 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放射狀)으로 설치되어 있다.

콜로세움의 명칭은 근처에 네로의 거상(巨像:colossus)이 있었던 데에 유래한다.

 

 

 

 티투스는 등극하기 전인 70년에 이스라엘 왕국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10만 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환하였다.

그 중 4만 명을 동원하여 콜로세움을 건축했다는 전설이 있다.

 

 

 

콜로세움은 검투사들끼리의 싸움이나 맹수들과의 싸움을 시민들에게 구경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일체감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콜로세움은 608년까지는 경기장으로 사용되었지만 중세기에는 군사적 요새로 이용되다가

그 이후에는 성당이나 궁전 등의 건축에 사용될 자제의 제공 터가 되었다.

 

 

 

 콘스탄 티누스 개선문

콜러세움 옆에 있는것으로서 315년에 원로원이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서러마 통일을 기념하여 건조한것으로

높이 21m 너비 25.7m  안길이 7.5m 의 흰색 대리석 건물로서 아치부분에는 색채석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빠리에 있는 개선문이 여기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모델로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분의 떠받치는 힘을 더하기 위해 적당한 언덕을 파서 세운 이전의 원형경기장과는 달리 콜로세움은 돌과 콘크리트로 세운

완전한 독립구조물로서 가로, 세로가 각각 190m, 155m에 이르며 5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 경기장에서 수천 회에 걸친 검투사 시합과, 맹수들과 인간의 싸움, 모의 해전 같은 대규모 전투장면이 실연되었다.

중세 때에는 낙뢰와 지진으로 손상되었으며 반달족에 의해 더욱 심하게 파손되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었던 좌석과 장식물들은 남아 있지 않다.

 

 

 

 이 거대한 원형극장은 4층으로 되어 있었다. 1층은 높이 10.5m의 도리아식 반원주, 2층은 높이 11.85m의 이오니아식 기둥,

3층은 11.6m의 코린트식 기둥으로 되어 있고, 4층은 관중들이 작열하는 햇빛을 피할 수 있게 벨라리움이라는 천막을 고정시키기 위한

장대장치를 지탱하는 벽으로 되어 있다. 이외에도 계단과 독립 공간, 즉 갈레리아가 있었다.

 

 

 

 이 갈레리아는 이집트산 콩, 음료수 등을 파는 상인들의 휴식공간으로 많은 시민들이 여기서 조우했다.

경기장 바닥은 모래로 덮이고, 곳곳에는 사냥장의 분위기를 살려 나무와 구릉을 설치하였다. 
 

 

 

 콜로세움이 준공될 당시인 서기 80년에는 티투스 황제에 의해 기념흥행으로 100일에 가까운 투기(鬪技)가 열렸다고 한다.출입구는 수십

개의 대형아치 모양으로 만들었고 이곳을 통하여 관객들을 빠르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과연 5만명이나 되는 관객들은 콜로세움에서 벌어

지는 그 이전까지 행사와는 비교가 안될만큼의 대형 행사에 매려되기 시작하였다.
 

 

 

 행사는 무려100일간이나 진행되었으며 그기간동안 검투사가 2000여명, 야수가 9000여 마리가 희생되었다.

경기 운영방법은 먼저 격렬한 격투를 보여주고 음식과 술을 제공하여 주고, 그 후 유정자들의 목적인 반역자들을

관객의 의도를 유도하여 처형하는 행사로 마무리를 하였다.

 

물론 관객들은 구명을 요구할 수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관객들은 잔인한 사형장면을 원했기 때문에

무대에 오른 반역자가 살아남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바닥 밑에는 노예들과 맹수들을 수용하던 각종 우리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바다에서의 싸움 장면도 연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바닥 전체에 물을 가두는 일이 용이하지 않아 별도의 공간을 따로 마련하였다. 
 

 

 

 검투사들의 경기는 실제 전투에서 사용되는 검과 창이다. 또 그들은 고도로 훈련되어 있어 찔리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되고, 관중들은 생명의 존엄성을 망각하고 마지막 숨을 끊을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검투사들의 경기는 낳은 편이다.  사자나 호랑이와 싸우는 경기는 더욱 잔혹하다.

그들은 맹수들을 사납게 하기 위해서 며칠씩이나 굶기기도 하였다. 만약 우리자신이 굶주린

맹수앞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자. 자신을 보호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몸에 걸친 천조각 하나 뿐이다.

 

 

 

  로마시민들은 맹수들이 잔혹하게 사람을 사냥하는 모습을 보며 즐겼다.  사냥당한 사람들이 비록 전쟁포로나 미천한 신분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도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존엄성이 있다. 그러나 로마시민들은 철저하게 그것을 무시하였다.
 더 잔혹한 장면이 나오면 나올수록 관중석에서는 술과 음식으로 넘쳐났다. 그들은 점점더 다양한 장면을 원했고 전차경주나

심지어는 경기장을 물로 채워 해상전투장면을 재연 하기도 하였다.

 

 

 

   콜로세움의 공사는 도미티아누스황제시대에도 계속 이어졌고 네르바황제와 트라야누스황제 때에도 개축 또는 증축공사를 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의 벼락을 맞아, 그때마다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6세기 전반까지 행해졌다.
 그런것을 보면 이 경기장은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을 채워주는데 매우 유용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제국의 건전성을 침해하였으며, 보다 작은 충격에도 보다 큰 타격을 입는 결과로 가져왔다.
 콜로세움은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과 그릇된 쾌락이 얼마나 타락해 질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유적지라 할 수 있다.

 

 

 

 

 

 

 

 

 

 

 

 

글래디에이터(Gladiator,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