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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성 베드로 대성당.

관주 觀周 2008. 6. 2.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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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성 베드로 대성당 

 

 
베드로 대성당은 처음 완공되던 349년부터 현재까지 세계기독교의 성지순례장소로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곳에는 사도 베드로를 비롯하여 초기 로마 교회의 순교자들 무덤이 안치되어 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렘에서 직접 가져온 십자가와 베로니카 성녀의 수건, 그리고 그리스도를 찌른 창들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성당의 규모에 의해 압도를 당한다. 대성당이 세워진 대지는 모두 25.616제곱미터(약85,000평)에 달하며,
중앙 통로의 길이는 187미터, 폭은 140미터, 높이는 46미터이며, 중앙 제대 위에 있는 돔까지의 높이는 137미터이다.
또한 대성당 내부에는 모두 44개의 크고 작은 제대가 있으며, 395개의 조각과 135개의 모자이크로 된 그림이 내벽과
돔 안쪽에 장식되어 있다. 1700년대의 건축 비평가였던 밀리치아가 대성전에 대해 평한 것을 보면, 누구든지 처음
대성당에 들어오면서 외부에서 받았던 성전의 거대함으로 인한 위압감이, 내부의 잘 조화된 모습들로 인해
조금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 베드로의 무덤
중앙 제대 아래쪽의 작은 벽감 안에 은으로 장식된 작은 상자가 있다. 이는 교황 베네딕투스 14세(1740-1758)가 봉헌한 것인데,
그 안에는 교황 리노(제2대 교황으로 사도 베드로 다음 후계자)가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오는 영대가 있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새로
선정된 주교나, 로마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각국의 주교단들이,사도의 대리자로써 자신들에게 맡겨진 목자의 직분을 충실히 하며,
교계 제도에 순종하겠다는 서약을 하거나 갱신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는 6세기경부터 생긴 교회의 전통으로서, 전세계 그리스도인과 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 성직자, 수도자 등 모두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성베드로와 그의 후계자인 교황과 함께 하나의 교회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성좌
로마의 그리스도인 사이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 들어와서 선교 활동을 하였을 때 앉았던 나무 의자의
조각들을 모아서 5세기경 의자의 형태를 만들었고, 그 위를 흰 상아로 장식하여 전해져 왔다고 한다. 이것을 교황 알렉산데르 7세(1655-1667)
가 베르니니를 시켜 다시 그 위를 청동으로 장식케 했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어쨌든 고고학적 또는 과학적으로 사도 베드로가 과연 이
의자에 앉았었느냐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초세기 때부터 이 의자는 사도 베드로의 무덤을 표시하기위해 그 위에 세웠던 기념비와 함께
내려온 사도의 유물로 그리스도인들이 경배해 왔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제 이 청동 의자의 위쪽을 보면, 천연 대리석을 얇게 깎아서 마치
유리처럼 보이는 타원형 안의 중심에 비둘기가 자리잡고 있다. 이 비둘기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성령을 의미한다. 타원형을 잘 살펴보면
열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를 상징한다. 또한 타원형의 둥근 모습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은 삼위일체,
즉 3이라는 숫자의 종교적인 의미를 갖기도 한다. 교회에서는 모든 숫자 중 가장 완벽한 수를 3이라고 한다. 이 청동 의자의 네 다리를 잡고 있는
청동상들을 보면, 앞쪽으로 미트라(Mitra:카톨릭 교회에서 주교들이 미사 중에 쓰는 모자)를 쓰고 있는 청동상은 성 암브로시우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서방 로마 카톨릭 교회의 대표적 4대 교부(일명, 교회박사라고도 함)에 속하는 분들이다. 뒤쪽으로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와
성 아타나시우스로서 동방 그리스 정교회의 4대 교부에 속한다. 청동 의자의 네 다리를 들고 있는 교부들의 모습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들이 표명하였던 그들의 교부학 이론이 바로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며, 이는 다시 사도 베드로가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음의 사실들은 변경되거나 바뀔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또한, 성령 안에서 항상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표현하고 있으며, 또 다른 의미로는 갈라진 두 교회(동방과 서방)가 일치를
이루어야함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베르니니의 신앙을 기초로 한 예술적 표현은 세기를 거듭할수록 더욱더 새롭게 조명되어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베르니니의 천개
이 천개야말로 베르니니의 작품중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1568-1644)의 명에 의해 제작된 이것은, 그 위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거대한 돔과 함께 성베드로 대성당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양대 예술 양식중 최고의 예술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천개를 제작하기 위해 필요했던 막대한 양의 청동 금속은 이탈리아에서 모아졌는데, 그 중에서도 베네치아 지방에서 많은 양이 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모아진 금속의 양은 211,427파운드에 달하였다. 그런데도 양이 부족하자, 마침내는 로마에 있는 기원전 1세기 때의 신전인 판테온의
내부 천장의 청동을 떼어서 충당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비판의 소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이것은 바르바리(야만인이라는 뜻)가 한 게 아니라, 바르베리니(교황의 가문)가 한 일이다."라는 말로써 교황을 비꼬기도 하였다. 이 천개를
직접 구상하고 설계한 베르니니는, 후에 자신의 아이디어는 인간의 영혼이 하늘로 올려지는 것에서 착안되었다고 했다. 내부 중앙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성령의 빛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고, 위쪽으로는 네 명의 천사가 화관(花冠)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또 다른 작은 천사들은 삼중관과 열쇠, 칼 그리고 복음을 들고 있다.
 이 중에서 삼중관과 열쇠는 사도 베드로를 상징하며, 칼과 복음은 사도 바울을 상징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피에타란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임).
미켈란젤로(1475-1564)는 그의 나이 25살 때에 이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피렌체에서 보관중인 다비드상,
그리고 로마 성베드로의 쇠사슬 성당에서 보관중인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에 들어간다.
이 상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 유일하게 그의 서명을 남긴 작품이기도 하다. 돌아가신 예수님을 무릎에 안은 성모님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아들 예수님의 나이에 비해 너무나 젊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성모님의 얼굴이
젊게 표현된 이유를 미켈란젤로의 제자였던 아스카니오 카우디비가 그의 스승에게 물었을 때,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스카니오, 너는 아직도 모르느냐? 정결한 여자들은 무릇 그 정결함을 고귀하게 유지시켜야 하지 않겠느냐? 하물며 동정녀로서
잉태하신 성모님의 정결함은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지 않겠느냐?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님의 모습을 젊고 아름답게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아라.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파견되었으며, 사람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통을 받으셨다. 그분의 처절한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그분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양심의 성찰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이 바로 나의 의도이다." 우리는 한 예술가를 재조명해 보면서 르네상스의
마지막 대가였던 미켈란젤로를 그저 조각가나 건축설계사로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예술 세계는 바로 그의 깊은 신앙심의 바탕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러기에 몇 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경이적인 찬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성 베드로의 청동상
이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1245-1302)의 작품으로, 작가는 현재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무덤 출구 앞에 놓여 있는
성베드로의 오래된 대리석상(5세기경으로 추정)에서 영감을 얻어, 이와 비슷하게 청동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중세기 때부터 이곳을 찾는 수많은 순례자들이, 특히 이 청동상의 발에 입맞추며 기도를 바치는 전통 때문에, 현재
오른쪽 발가락은 거의 다 닳아서 그 원 모양이 없어지고, 이제는 발가락도 많이 닳은 상태이다. 이는 1857년 3월 15일,
교황 비오 9세가 특별한 회칙을 통해 이날부터 50일간을 임시 성년으로 반포하며, 베드로 대성당에 와서 이 동상의
발에 입맞춤 해야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유럽 전역의 많은 순례자들이 이 기간 동안
한꺼번에 몰려들어 사도의 오른쪽 발등에 입맞춤하는 바람에 발등이 심하게 닳았다고 한다.  

 

 

 

 

 

 중앙 상단 우측에서 두번째 창문이 교황의 집무실이란다.
일요일 베드로 광장에 전 세계에서 모인 신자, 관광객에게 오후 2시쯤 모습을 들어내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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