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사진/베트남

12. 베트남의 정신적인 지도자 호치민.

관주 觀周 2009. 3. 19. 21:07

 

   觀主의 카메라 기행 : 동남아편   

 

 
 


 

 이번 여행일정의 마지막 날이다.  하롱베이를 아침에 출발하여 약 3시간 30분후 하노이에 도착하여 하노이 시내를 둘러보고 점심 식사후 호치민 박물관, 호치민 생가, 호치민 영묘 등을 둘러본후 석식, 공항으로 이동하여 한밤인 23:35분 인천공항행 비행기에 탑승하면 이번 여행의 모든 일정이 끝이 난다. 

 


  

호치민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베트남이 1976년 공산화 되면서부터 한 때 외국의 원조를 단절하기도 하였고 10년 뒤인     1986년부터 개혁을 단행,  경제발전의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인구 8000만 명에 이르는 베트남의 개발속도는 무척 빠르다. 보트피플로 얼룩졌던 전쟁의 상혼을 딛고 통신, 전자, 무역 등 각 분야에서 눈부신 성장을 하고 있다. 호치민과 정약용.     베트남은 아직도 전쟁영웅 호치민의 정신이 여기 저기 베어 있다. 정약용의 ‘목심심서’를 자신의 몸처럼 아꼈다는 호치민. 그는 다산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호치민은 국민이 있음으로 관(官)이 있다고 역설하며 철저히 국민들 속에 들어가 함께 살고자 했다. 호치민은 '3꿍 정신'을 실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3꿍 정신'의 첫째는 국민과 함께 산다는 '꿍아', 둘째는 함께 먹는다는 '꿍안', 셋째는 함께 일한다는 '꿍땀'이 그것이다.
 

 

호치민의 묘소는 1945년 9월2일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호치민의 바딩(Ba Dinh) 광장에 있다. 대리석을 사용해 러시아 양식으로 지어진 호치민 기념관에 안치된 호치민의 시신은 방부처리 되어 유리관 내에 보관돼 있다. 그러나 호치민의 시신은 지금 이곳 영묘에 없었다. 1년에 3개월씩은 방부처리의 지속을 위해서 반드시 정례적으로 그 방면의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러시아로 싣고 가 화학처리를 한다는 것인데 가는 날이 바로 그 장날이었던 것이다. 이미 사망했으되 죽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권위의 필연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시신이 영구보존처리된 경우는북한의 김일성에 이어서 러시아의 레닌,    중국의 마오쩌둥, 베트남의 호치민 등이 있다고 하는데 모두가 사회주의를 국가들이다.          
 

 

 
 
호치민묘 출구 근처에는 1906년에 프랑스 총독 관저로 지어져서 지금은 대통령 관저로 쓰이는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베트남이 독립했을 당시 프랑스 식민시절 고초를 겪었던 민중들이 허물어버리자고 했으나 호치민이 “우리 베트남 흙과 돌을 가지고 우리 인민들이 피와 땀을 흘려가며 지은 건물인데 일부러 왜 허물어버리느냐, 앞으로도 이 건물을 보며    프랑스 식민시절의 아픔을 곱씹으며 살자”고 말해 남아있다 한다. 그때 사람들은 “그렇다면 주석인 호치민이 이곳에    살면 맞겠다” 했으나 호치민은 “나는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정원사들이 사용하던 숙소에서 기거를 하기로 했다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 나라의 주석이 정원사들의 숙소에서 기거 하는 것이 맞지 않다고 몇 번을 청했고 이에 호치민은 그렇다면 예전 한참 게릴라 투쟁 당시 살던 집 모양으로 집을 지어 당시를 잊지 말자고 해 작게 집을 지었고 그곳에서 1954년 12월부터 1969년 9월 죽을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호치민의 서재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를 지침삼아 '3꿍 정신'을 철저히 실천했던 호치민. 그가 죽기 10년전까지 살았던 목조가옥엔 단백한 유품만 남아있다. 지팡이 하나와 옷 두벌, 목민심서를 비롯한 책 몇 권, 나무 책상 하나, 고물 시계 하나가 전부다.                                                                                                                  

 
15년 동안 호치민이 살았던 이 집은 조그만 연못과 아담한 정자,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으며 1층에는 소규모 회의실, 2층에는      침실과 서재로 꾸며져 있다. 이 소박한 집에서 호치민은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탐독하면서 국민을 위한 정치를 구상했다고 한다. 그의 소박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평소에 주머니가 있는 옷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내 주머니에 사소한 작은 것이라도 넣지   않기 위함으로 늘 폐타이어로 만든 고무 슬리퍼와 간편한 고무줄 바지 등을 입곤 했단다.     
  

 
 

 

 베트남 민족운동의 최고 지도자였으며 베트남 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베트남의 아버지’ 호치민(胡志明. 1890~1969). 1969년 사망한 호치민의 머리맡에는 생전에 애독했던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牧民心書)'가 놓여 있다고 한다 호치민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시절 다른 소지품은 못 챙겨도 목민심서 만큼은 꼭 챙겼을 정도로 목민심서를 아꼈다한다. 덕분에 목민심서는 베트남 공무원들의 지침서로    채택 되기도 했다고 한다   


 


 

 전쟁기념관에 전시되고있는 각종 무기들.... 

  

 
효치민묘 바로 뒤에는 호치민 박물관이 있다. 국민적인 영웅인 호치민을 배우고 기리기 위해 베트남의 웬만한 도시에는 호치민 박물관이나 기념관이 하나씩 있는데 호치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90년 개장했다고 한다. 연꽃모양을 한        이 건물은 20세기의 격동기에 호가 맡았던 역할을 증언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한 건물 외관과는 달리 호치민은 시계, 라디오, 책 300권, 폐타이어로 만든 낡은 슬리퍼 등 정작 유품을 별로 남기지 않아 그 모든 박물관과 기념관을 다  채울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박물관과 기념관은 비슷비슷한 사진자료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일주각
이곳에서 향을 피우며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한다. 특히 자녀들에 대한 기도를 많이 한다는데, 

어디를 가나 부모의 마음은 똑 같은가 보다. 

 
 
소원이 이루어 진다니 나도 향을피우고 소원을 빌어 본다....

내가 올리는 카메라 여행기,  비록 읽고 볼거리가 없지만 나름데로 정성을 다해서 작성하니

보시는 분들 댓글을 많이 달아 달라고...


 

 
 

이상으로 캄보디아 의 앙코르왓, 베트남의 하롱베이 여행 카메라 기행을 마칠까 합니다.

그동안, 댓글과 메일로 격려를 하여주신 여러분 감사 합니다.  
 
다음은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의 남쪽 규슈지역을 다음 주 3월 말에 돌아볼 예정 입니다.
벗꽃 개화기에 찾아가는 일본 규슈, 현지에서 촬영한 아름다운 사진으로
여러분들에게 또다시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귀댁에 건강과 만복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감사 합니다.
 
觀主  金 光 鎰
 

 

초대 : 왕대장 큰아빠
   http://blog.daum.net/afa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