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북촌 한옥마을, 백송, 인사동.

관주 觀周 2008. 9. 24. 17:32

북촌 한옥마을, 백송, 인사동.


추석연휴인 9/15일 이른아침 동생과함께 카메라를메고

북촌과 인사동일대를  돌아보고 왔습니다.

 

서울서 살면서도 일부러 가볼수가 없었던곳인 북촌.....

서울 600년 역사와 함께해온 우리의 전통 거주지역 북촌을 함께 돌아 봅시다.

 

 

북촌지역은 예로부터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의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서울 600년 역사와 함께 해

온 우리의 전통 거주 지역이다. 조선왕조의 자연관과 세계관을 보여주는 조선성리학에 기초하여 배

치된 궁궐사이에 위치한 이 지역은 뛰어난 자연경치를 배경으로 거대한 두 궁궐 사이에 밀접하여

전통 한옥군이 위치하고 있으며, 수많은 가지모양의 골목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600년 역사도

시의 풍경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로부터 원서동,재동,계동,가회동,인사동으로 구성된 이 지역은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이름

에서 ‘북촌(north village)'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당시로서는 왕실의 고위관직에 있거나

왕족이 거주하는 고급 주거지구로 유명하였다. 곳곳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몇 채의 한옥들은 이때의

명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조선말기에 이르러 이 지역은 사회, 경제상의 이유로 대규모의 토지가 잘게 나뉘어 소규모의 택지

로 분할 되었으며, 지금 볼 수 있는 어깨를 맞댄 도심주거형 한옥은 1930년도를 전후하여 개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한옥형식의 변화는 근대화 시기의 도심으로 밀려드는 인구들로 인해 고밀

도화 되어가는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전의 대형한옥이 고급자재와 전문 목수(도목)에 의해

설계, 시공되고 건물의 배치가 성글게 놓여진데 비해 이 시기에 지어진 도심 한옥군은 필요에 의해

대규모로 생산되었으며, 중정을 갖는 전통배치를 유지하면서도 좁은 공간 속에서 최대한의 공간활

용을 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여러 채의 한옥이 지붕처마를 잇대고 벽과 벽을 이웃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풍경은 우리들이 잊고

살았던 따뜻한 정과 살아갈 맛을 느끼게 해준다. 북촌지역을 걷다보면 이어진 처마선의 아름다움

만큼이나 골목길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서구의 네모 반듯한 도로가 아니라 마치 물이 흘러 내

려가듯 가지에 가지를 치는 도로체계는 이 지역의 오랜 특성 중의 하나이다. 인사동길은 원래 청계

천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타고 형성되었으며, 삼청동과 가회동의 길 또한 북한산의 지류를 따라 형

성되었다. 때론 지나는 이웃의 어깨가 닿을 듯한 폭에서 옛 우마가 지날 듯한 골목은 미로처럼 연

결되어있으며, 좁아졌다 넓어지고 다시 좁아지곤 하는 골목의 연결을 따라 옛 한옥들이 맞닿아 있

는 풍경은 이 지역의 맛을 더해주는 요소이다.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볼 때 서울에서의 최상지는 경복궁이고, 다음이 창덕궁이니 이 궁궐을 연결

하는 선상의 지역, 북악과 응봉을 연결하는 산줄기의 남쪽 기슭에서 현 율곡로 좌우측 일대는 주거

입지 즉, 양기풍수상(陽氣風水上)의 최길지(最吉地)였으며, 이 지역은 이른바 북고남저(北高南低)

로서 겨울에 따뜻하고, 배수가 잘 될 뿐 아니라 남쪽은 넓게 트였으며, 안산(案山)인 남산의 전망

도 좋아 정침(正寢)이나 사랑(斜廊)이 항상 남면(南面)할 수 있는 장점도 지녀 이 일대에 그때마다

의 권문세가(權門勢家)들이 모였던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곳에 집거함으로써 자기들끼리의 대면을 통한 정보 교환이 가능했으며 그들의 지배를 언

제나 합리화하고 장기화하기 위한 유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물론 그 내부에 있어서는 오히려

분파활동(分派活動)을 활발하게 하는 요인도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곧 서울에 있는 북촌(北村)의

형성 과정이다.한편 당대의 권문세가가 아닌 하급관리들이라든가 양반의 자손이기는 하나 현직의

고급관인이 아닌 자들은 남산 기슭인 이른바 남촌(南村)에 살았다. 그곳은 음지(陰地)이기는 하나

배수가 잘 되고 지하수가 풍부하여 취수에 편리했으니 오늘날의 중구 남산동에서 필동을 거쳐 묵정

동에 이르는 지역으로, 『매천야록(梅川野錄)』권1 상에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부

르며 노론(老論)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少論) 이하 삼색(三色)이 섞여서

살았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황현(黃炫)의 『매천야록(梅泉野錄)』권1 상은 고종 원년(1864)에서

동 24년(1887)의 일을 두루 적었는데 이 당시 북촌에는 노론만이 거주하였고 소론과 남인 북인은

설령 고급관인일지라도 남촌에 섞여 살았다고 한다. .

 

 

 

 

 

 

 

 

 

 

헌법재판소의 보호받는 서울 재동 백송


어린 조카의 용상을 넘보아 온 수양대군은 단종 1년(1452) 10월 10일 밤, 집권에 걸림돌이 되

는 김종서를 집으로 직접 찾아가서 죽여 버린다. 이렇게 시작된 쿠데타는 이름하여 ‘계유정난

’이다. 피 바다가 되어버 린 그의 집 일대에 피 비린내를 없애기 위하여 사람들은 재를 가져

다 뿌렸다. 이후 ‘잿골’이 되었다가가 오 늘날의 재동이 되었다고 한다. 참극이 벌어졌던 재

동의 한 편에는 핏빛에도 잿빛에도 어울리지 않은 깨끗 한 백송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누

군가 한양정도 전후에 멀리 중국에서 가져다 심은 것이다. 훗날 다시 는 비극의 현장이 되지

말고 흰 껍질처럼 깨끗한 동네가 되기를 어린 백송은 기원하였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생장이 느린 백송도 조금씩 몸집을 키워가는 사이, 자람터는 어느덧 영조 때 유명

한 재상 조상 경의 집이 되어 있었다. 그는 7번에 걸쳐 판서를 하면서 조선후기 풍양 조씨 세

도정치의 주춧돌을 놓은 인 물이다. 이후 100여 년 동안 백송은 승승장구하는 조씨 일가와 영

광의 세월을 함께 했다. 순조19년(1819년) 에 이르러 조씨 집안에 다시 커다란 경사가 생긴다.

조만영의 12살짜리 어린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가 까운 창덕궁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녀는 훗날 고종이 집권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신정왕후 조대비 가 된다. 1863년 고종이 임

금으로 등극할 즈음의 어느 때, 전후 사정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조대비의 친정 집 일대는 김

옥균 등 개화 사상가들의 대부, 박규수에게 넘어간다. 백송은 그의 집 사랑채 뜰에 있었다고

한다.

 

 

 

이후 거센 개화의 물결을 타고 우여곡절 끝에 이 일대는 경기여고가 들어선다. 백송은 기숙사

바로 앞에 있 었고 신여성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역사의 격변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이어

서 창덕여고가 들어와 있 다가 1989년 방이동으로 이사를 가버리고 지금은 대한민국 최고의 권

위기관 헌법재판소 지킴이 나무로 자 리를 잡았다.

 

나무는 본관건물과 거 의 붙어서 왼편 뒤쪽 언덕바지에 자란다. 북쪽 담장너머는 윤보선 대

통령의 생가다. 한 아름에 이르는 흰 얼룩무늬 나무가 거의 밑둥부터 V자로 갈라져 있다. 벌어

지는 나무줄기는 굵은 쇠줄로 튼튼하게 잡아매어 두었다. 높이 17m, 뿌리목 둘레는 3.8m, V자

가지 굵기는 각각 둘레 2.4m와 1.9m에 이른다. 이 백송은 껍질 의 아름다움으로 널리 이름을

떨친다. 희고 고운 피부는 나라 안의 훨씬 젊은 다른 어떤 백송도 따라오지 못한다. 그만큼 건

강하다는 증거다.

 

 

 

인사동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한국문화를 엿보기 위해 제일 먼저 찾는 곳은 메리스 엘리(mary’s alley/메리의 뒷골목)로 더 잘 알려진 인사

동이다. 가장 한국적인거리로 외국인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중심가 양쪽에는 골동품가게 고미술품가게 등이 늘어서 있다.

 

 

인사동에 갤러리가 밀집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화랑인 ‘현대화랑’(현재 사간동에 자리한 '갤러리 현대'를

가리킴)이 개관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의 상업화가 시작됐다. 특히 74년 골동품에 대한 중과세조치와 가짜 고서화 사건등으로 골동품

가게들이 문을 닫자 그 자리에 화랑이 들어섰다.

 

 

80년대 이후에는 현대미술을 다루는 전문화랑이 속속 문을 열었다. 기존의 고미술품점과 현대미술 전문화랑이

인사동길을 따라 밀집하면서 소격동, 삼청동으로 이어지는 미술관 벨트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인사동이 가장 북적대는 날은 수요일과 주말이다. 보통 수요일은 전시회를 오픈하는

날이고 주말은 관람객의 증대로 인한 것이다.

 

 

작품활동에 여념이 없는 "은구아빠"

 

 

 

 

 
김수철 4부작 [팔만대장경]
서곡(序曲) - 다가 오는 검은 구름 (The Gathering Storm)]
조용하고 평화롭던 고려에 몽고군의 침략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하는 도입부.
전반부에서는 단조로운 멜로디로 평화로운 시기를 표현하였고 점차 전운이 감도는

상황을 일정한 리듬의 타악기로 나타냈다. 1장의 막바지에는 큰 북을 사용해서

전쟁의 불안감, 긴박감, 공포를 표출하여 전쟁이 임박했음에 대한 암시로

비극을 표현하는 장엄한 멜로디가 그야말로 감동의 절정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