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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 부여정림사지 [ 扶餘定林寺址 ]

관주 觀周 2020. 7. 1. 10:31

 

-. 일시 : 2020.  06. 28(일요일)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사찰터. 
-. 시대 : 고대/삼국/백제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301호, 지정면적 5만 9245㎡ 
-. 탐방자 : 여의도 의사회 문화탐방팀. 
-. 카메라 : Canon EOS 6D MK2       

              EF 35mm F2 IS USM , EF 70-200mm F4L IS II USM 

 

백제 성왕이 538년 봄,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중앙 동·서·남·북 등 5부로 구획하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 등을 건립할 때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가 세워졌다. 

 

백제시대의 석탑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

정림사와 왕궁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北魏) 낙양성(洛陽城)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어, 정림사는 백제 왕실 또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시대의 석탑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은 백제인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진 석탑이지만, 초층 하부에 있는 소정방(蘇定方)의 평제기공문(平濟紀功文), 즉 소정방이 백제를 멸한 기념으로 새긴 글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렸다. 

 

백제시대의 석탑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

그러나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가 절터 발굴조사 중에 발굴한 기와조각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란 명문이 적혀 있어, 태평 8년인 고려 현종 19년에 정림사로 불리웠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정림사지’와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백제시대의 석탑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높이 5.62m의 석불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어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계속 법통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 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놓이고 강당 좌우의 부속건물과 중문을 연결하는 회랑(廻廊)이 둘러싸고 있는 ‘일탑식가람(一塔式伽藍)’ 배치이다. 이는 정림사뿐만 아니라 부여에서 발견된 다른 사찰에도 확인되므로 백제 사비시대의 전형적인 가람배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높이 5.62m의 석불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0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