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음악

불멸의 오페라 디바 '마리아칼라스' (상)

관주 觀周 2016. 10. 8. 09:41

[음악산책] 불멸의 오페라 디바 '마리아칼라스' (상)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무대의 여신

뉴데일리경제 박정규 대표 기자 프로필보기 || 최종편집 2014.06.03 09:35:55

 




  • 세계 역사는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B.C.=Before Christ)과 기원후(A.D.=Anno Domini)로 나뉜다.

     

    오페라에서 소프라노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는 Diva(여신), 무대의 꽃이다. 1923년 태어나 1977년 55세의 짧은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한 마리아 칼라스.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그에 견줄만한 소프라노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음악계에서 소프라노의 역사를 마리아 칼라스(B.C.= Before Callas)를 전-후로 비교해 쓰는 것이 결코 과장된 게 아니다.

     

    소프라노는 콜로라투라-레제로-리릭-스핀토-드라마티코로 나뉜다. 대부분 소프라노들은 극고음이 잘 나지만 얇은 소리(콜로라투라) 또는 중저음과 고음이 나름대로 탄탄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쏟아내는 표현력이 부족한 소리(리릭), 격정적 표현력이 탁월하고 풍부하지만 하이C 이상의 극고음은 흔들리거나 플랫되기 일쑤인 소리(스핀토, 드라마티코)처럼 어느 한 부분에서 장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마리아 칼라스는 중저음에선 마치 메조 소프라노의 음색에 전혀 못지 않을 만큼 풍부하고 깊은 소리를 내지만, 극고음으로 치달을 때는 콜로라투라의 표현력을 아낌없이 발한다. 특히 대부분 소프라노들이 고음으로 갈수록 소리가 작아지는 반면 마리아 칼라스의 극고음은 중저음 못지않은 성량으로 관객들의 심금을 파고든다.

     

    마리아 칼라스는 오페라 토스카의 명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가사처럼 노래로 세상을 얻었지만,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파멸을 자초한 삶을 살았다.

     

    칼라스는 그리스인을 양친으로 1923년 12월 2일 뉴욕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으나 14세 때 어머니, 언니와 함께 아테네로 돌아가 아테네 음악원에서 유명한 소프라노 엘비라 히달고를 사사했다. 음악원 졸업 후인 1941년 아테네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토스카’로 데뷔했고 이후 3년 동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등에 출연했다.

     

    하지만 진정한 그녀의 이력이 시작된 것은 6년 후인 1947년, 베로나에서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칼라스는 ‘노르마’를 비롯해 ‘메데아’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베르디의 ‘멕베스’와 ‘라 트라비아타’ 푸치니의 ‘토스카’ 등에서 오페라 예술사에 불후의 기념비를 세웠다.

     

    마리아 칼라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50년대부터 6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세계의 모든 신문들은 그녀의 예술 뿐만 아니라 사생활에 대한 것까지 칼라스에 관련된 것이면 무엇이나 시시콜콜 기사화 했다. 

     

    대중의 관심은 1959년 칼라스가 12년 동안 유례없이 다정한 부부로 함께 생활해 온 남편 메네기니를 버리고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줄행랑을 쳤을 때 절정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오나시스가 재클린과 결혼하자, 마리아 칼라스는 극도의 충격으로 목소리와 인생 모두를 잃게 되고 1965년 42세의 한창 나이에 은퇴한다.

     

    1970년대초 무대에 복귀한 마리아 칼라스는 쥬세페 디 스테파노와 세계 순회공연을 하는 등 연주활동을 전개했지만, 한 번 쇠약해진 목소리는 다시 예전의 영화를 찾을 수 없었다.

     

    전 남편을 그리워하며 고독한 말년을 보내던 칼라스는 1977년 9월 16일, ‘세기의 목소리’ ‘불멸의 디바’라는 전설을 남기고 54세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마리아칼라스와 그를 스타로 키운 남편 메네기니

     

    하루 아침에 결혼 생활이 파탄을 맞았을 때까지 칼라스 부부는 거의 믿을 수 없을만큼 다정한 한쌍이었다. 이탈리아의 대부호로 예술 애호가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남편이자 보호자요 매니저였으므로 둘은 예술과 생활을 완벽하게 공유했다.

     

    메네기니의 도움으로 칼라스는 극히 짧은 시일내 에 세계 최고의 가수가 되었으며, 남편을 떠난 후로는 한동안 명성의 광휘를 누리긴 했으나 곧 그녀의 경력은 쇠퇴했다.

     

    ▲마리아 칼라스와 남편 메네기니. 칼라스는 그를 떠났지만, 끝까지 마음 속을 지켰던 남편이었다. ⓒ

    칼라스 자신이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전적으로 나를 의탁할 수 있는 남편을 매니저로 가졌어요. 그는 나를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만들 수 있어요."


     

    메네기니는 마리아 칼라스가 이탈리아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한 눈에 알아보고 디바로 키우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아레나 극장의 오페라 코러스 매스터인 페루치오 쿠지나티를 마리아의 성악교사로 초빙했다. 엘비라 히달고는 칼라스에게 노래의 테크닉을 가르치고 그녀에게 음악의 세계를 열어줬지만, 칼라스의 모든 오페라 레퍼토리를 가르친 사람은 구지나티였다.

     

    마리아 칼라스가 세계 오페라 극장의 제왕격인 라 스칼라를 정복한 1951년까지도 그녀는 95kg이 넘는 거구였다. 두 다리는 기형적으로 뚱뚱했고 발목은 과중한 몸무게를 지탱하느라 언제나 퉁퉁 부어 있었다.

     

    그녀에게 첫 성공의 길을 열어 준 베로나의 ‘라 조콘다’ 공연 때도 그녀의 부은 발목 때문에 무대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다만 그녀의 목소리가 워낙 탁월했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같은 점을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칼라스는 14세 때 어머니를 따라 그리스로 가기 위해 미국을 떠났을 때만 해도 날씬한 소녀였다. 아테네에서 달걀 요법에 근거한 의학적 치료를 받은 후부터 그녀는 살이 찌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또 일종의 선 질환으로 더욱 촉진되었다. 그녀는 걷잡을 수 없게 불어나는 체중을 감당할 수 없어 자주 차 한 잔 만으로 식사를 대신했지만, 처음에는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다이어트를 위해 케이크 종류는 절대로 섭취하지 않았고, 구운 고기나 익히지 않은 야채를 양념 없이 생으로 먹었다. 술은 단지 극소량의 와인만 마셨으며 디저트류 또한 입에 대지도 않는 등 노력을 편 결과 1954년 쯤에 그녀는 완전히 날씬한 여인이 돼 있었다.

     

    칼라스의 이같은 '변신'은 신문과 잡지에서 다투어 논쟁거리가 되었으며, 의사들과 영양학자들이 그녀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사실 1950년대 중반엔-특히나 여성들 사이에선-마리아 칼라스는 그녀의 노래보다도 신비스런 체중감소 때문에 더 유명했다. 매일처럼 그녀는 그녀의 비밀을 밝혀 달라고 애걸하는 수십 통의 편지를 여성들로부터 받곤 했다.

     

    메네기니는 마리아 칼라스의 식생활에서부터 무대 스케줄까지 모든 것을 관리해주는 조력자요 매니저였다.

     

    마리아 칼라스의 불행, 오나시스와의 만남

     

    칼라스의 인생은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만나면서 불행해지기 시작했다. 오나시스의 배신은 칼라스의 생애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마리아 칼라스와 비스콘티. ⓒ

    오나시스와의 스캔들과 메네기니와의 이혼, 오나시스의 배신은 칼라스에게 극복하기 힘든 상처가 됐고 삶과 음악을 모두 망가뜨렸다.


     

    무대마다 관객들의 열광을 불러일으키고, 오페라의 역사를 다시 쓰던 칼라스에게 남편 메네기니가 있었지만, 칼라스의 사랑을 다 채워줄 수는 없었다. 1954년 영화감독 루치아니 비스콘티를 사랑하게 되면서 자신 안의 여성을 재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비스콘티는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사랑이 이뤄질 수 없었다.

     

    이후 1957년 칼라스는 그리스의 선박재벌 오나시스와 운명의 만남을 갖게 된다. 베니스의 파치장에서 만난 인연으로 남편 메네기니와 함께 요트 항해에 초대받았던 칼라스는 오나시스와 사랑에 빠진다. 이 때부터 칼라스의 음악인생도 위기를 맞기 시작한다.

     

    1958년 1월 이탈리아 대통령이 참석한 ‘노르마’의 로마 갈라콘서트에서 몸이 아프다며 1막이 끝난 후 퇴장한 칼라스는 호된 비난을 받았다. 이어 5월에는 라 스칼라 극장의 예술감독과 크게 다퉈 스칼라를 떠나게 된다. 11월에는 메트로폴리탄에서도 해고된다.

     

    칼라스는 오나시스와의 사랑을 꽃 피우기 위해 메네기니에게 이혼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오나시스와 동거에 들어갔다.

    ▲마리아 칼라스의 불행이 된 오나시스 ⓒ


    1960년부터 2년여 동안 칼라스는 무대에 서지 않고 오로지 화려한 상류사회의 생활을 즐기는데만 몰두했다. 그러나 불행은 곧 시작됐다. 43세에 임신을 했지만, 오나시스가 아이를 거부하면서 낙태했으며, 이로인해 우울증에 걸려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65년 무대에서 은퇴한 칼라스는 1966년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획득하면서 오나시스와 결혼을 갈망했지만, 오나시스는 칼라스를 배신하고 1968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미마인 재클린과 결혼했다. (이후 오나시스는 허영심이 많은 재클린과의 결혼을 후회하고 칼라스를 그리워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나시스가 1975년 사망할 당시 칼라스가 선물한 붉은색 캐시미어 담요를 손에 꼭 쥐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리아 칼라스와 레나타 테발디

     

    레나타 테발디는 22세 때이던 1944년 보이토의 오페라 ‘메픽스토펠레’에서 주역을 맡은 후 승승장구했다.

    ‘라 스칼라’극장의 여왕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레나타 테발디에게 예기치 않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1950년, 아이다 공연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극장 측은 서둘러 대역을 쓰기로 했다. 레나타의 대타로 등장한 가수가 바로 마리아 칼라스였다. 마리아 칼라스는 당시 무명이었고, 거칠고 모난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다의 감정을 너무나 잘 표현하는 목소리에 넋이 나간 관객들은 열광했다. 작가 헤밍웨이는 ‘황금빛 목소리를 가진 태풍’이라고 칭송했고 공연을 본 관객마다 ‘새로운 디바가 등장했다’며 환호했다.

     

    단 한번의 공연으로 관객들을 사로 잡은 마리아 칼라스는 곧바로 스타덤에 올랐고, 그 후 오페라 팬들은 ‘마리아 칼라스파’와 ‘레나타 테발디파’로 갈리기 시작했다.

     

    라 스칼라 극장은 마리아 칼라스와 전속 계약을 맺기에 이른다. 1951년 스칼라극장의 브라질 공연에서 대스타였던 레나타 테발디는 신인인 마리아 칼라스와 한 무대에서 교대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상황을 맞는다.

     

    테발디는 공연 전 동료들에게 앙콜을 받지 말자고 제의했는데, 모두의 동의를 받아낸 후 정작 무대에서는 자신만 앙콜 연주를 했다. 물론 마리아 칼라스를 포함해 관객들의 앙콜을 받지 않은 동료들은 모두 비난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둘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거듭했다. 한번은 ‘라 트라비아타’ 공연에서 레나타 테발디가 키를 반음 낮춰 부르자 마리아 칼라스는 'TIME'과의 인터뷰에서 “자신과 테발디를 비교하는 것은 ‘샴페인과 김 빠진 콜라를 비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두 사람의 언행과 갈등은 실시간으로 전세계 신문에 좋은 가십거리로 보도됐다.

     

    1953년 3일 간격으로 레나타 테발디가 출연하는 ‘라 발리’와 마리아 칼라스의 ‘메데아’ 공연이 라 스칼라 극장에서 열리게 됐는데, 누가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할 지가 초유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칼라스의 공연은 표가 매진됐다. 그러나 레나타 테발디의 표는 조금 남아 있었다. 칼라스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이 공연을 계기로 레나타 테발디는 마리아 칼라스의 2인자로 전락하게 됐다.

     

    테발디는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제2의 음악인생을 시작한다.

     

    1968년 ‘아드리아나르쿠브뢰르’ 공연을 하고 있던 레나타 테발디에게 뜻 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남편 메네기니를 떠나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에게 갔으나, 오나시스의 배신으로 목소리와 인생 모두를 잃게 된 마리아 칼라스는 1965년 코벤트 가든 공연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은거 생활을 하던 중이었고, 테발디 공연소식을 듣고 찾아왔던 것이다.

       
    마리아 칼라스의 사정을 듣고 있던 테발디는 칼라스의 진심어린 화해를 받아들었다.

     

    둘은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음악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쳤고 결과적으로 그 덕택에 관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테발디는 2004년 12월 82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마리아칼라스의 죽음과 미스테리

     

    그녀의 죽음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보다 불과 몇 년 앞서 1973-74년에 걸쳐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세계 순회연주를 했을 때 그녀의 노래를 들었던 팬들에겐 칼라스의 갑작스런 죽음은 더욱이나 커다란 충격이었다.

     

    게다가 이 세기적 소프라노의 급사를 알리는 텔레비전에선 무척 이상한 보도를 했던 것이다. 즉 칼라스의 사망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녀의 집에 갔지만 아무도 그녀의 시신을 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칼라스와 가장 가까웠던, 가장 오랜 친구인 스테파노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전언에 따르면 마리아는 목욕을 한 뒤 침실로 가려고 애쓰다가 갑자기 사망했다. 그날 아침 마리아는 아침식사를 했는데, 나중에 목이 탄다면서 오렌지 주스를 달라고 했다. 하녀였던 브루나는 욕실로 주스를 갖다 줬고 마리아는 그걸 단숨에 마셨다. 브루나가 부엌으로 돌아왔을 때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달려와 본즉 마리아는 의식을 잃고 마루 위에 쓰러져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칼라스의 죽음은 의문 투성이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검시가 있을 법했지만, 친척 중 아무도 그걸 요구하지 않았고, 검시조차 없었다. 장례식은 9월 19일 화요일이었다. 시체는 파리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로 운반되었다가 거기서 공동묘지로 갔는데, 장례식을 어찌나 서둘러 처리했던지 모든 것이 수수께끼에 싸인 듯 했으며, 누구나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1974년 칼라스가 스테파노와 더불어 세계 순회연주를 했던 기간에도 그들이 밀라노에서 암 치료협회의 환자들을 위한 사적 연주회를 가졌던 걸 보면 칼라스가 옛날에 품었던 계획이 변치 않았던 듯 하다. 그러나 그녀의 사후 어떤 문서상의 유언도 발견되지는 않았다.

     

    칼라스와 메네기니는 결혼했을 당시에 누구든 먼저 사망할 경우 상호 유산을 남긴다는 문서에 서명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유언 검인이 끝난 후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유산을 전부 차지하려는 그녀 모친의 격렬한 반대에 부닥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후 6개월 동안 두 사람 사이엔 통렬한 법정 투쟁이 계속되었는데, 1978년 5월 마침내 쌍방은 유산을 동등하게 나누어 갖는다는 데 합의했다.

     

    그런 뒤 한 달 만에 조지 5세 호텔에서 파리 소재 칼라스의 아파트에 있는 가구, 잡기 등의 경매가 이틀에 걸쳐 실시되었다.

     

    이틀 간의 경매에서 가장 많은 물건을 매입한 사람은 바로 메네기니였다. 그는 자신이 칼라스와 함께 살던 시절 그녀에게 선물했던 대부분의 그림들을 포함해 그녀의 침대와 18세기 실크 카펫 등을 구입했다.

     

    그는 마리아의 재산엔 관심이 없었다. 오직 그녀의 추억을 간직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 여생을 바치려고 했다. 메네기니의 꿈은 그들 부부가 마지막 결혼생활을 영위한 시르미오네에다 마리아의 기념물을 전시해 두는 '칼라스 기념관'을 건립하는 일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계획을 완수하기 전에 그는 타계하고 말았다.

     

    남은 몇 가지 물건 가운데 칼라스가 항상 침상 곁의 나이트 테이블 위에 두고 보던 기도서가 있었다. 그런데 이 기도서 속 어떤 페이지에서 메네기니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의심을 불러 일으키는 기록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런던 사보이 호텔리의 머리 글자가 찍힌 푸른 종이었는데, 거기다 마리아는 연필로 몇 줄 적어놓고 있었다. 오른쪽 위쪽 구석에 이탈리아어로 '77년 여름'이라 적혀 있었는데 이것은 그녀가 죽기 얼마 전이란 걸 뜻했다. 날짜 아래쪽엔 'A T'라 적혀 있었고 이것은 '티타(Titta)에게'를 의미했다. 그런데 이 T는 마리아가 남편 메네기니에게 편지를 쓸 때 통상 사용하던 약자였다(바티스타 메네기니의 애칭은 티타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아래엔 다섯 줄로 된 오페라 ‘라 조콘다’의 싯귀가 적혀 있었다.

     

    ‘라 조콘다’는 칼라스와  메네기니에겐 운명적인 의미가 있었다.

     

    30년 전 그녀가 이탈리아의 무대에 처음 출연한 것이 이 오페라였고, 두 사람의 사랑이 싹튼 것도 바로 이 오페라의 리허설 때였다. 또한 그녀가 1959년 9월초에 남편을 버리고 오나시스를 따라가기로 결심했을 때도 역시 ‘라 조콘다’를 레코딩하고 있을 때였다.

     

    칼라스는 고독을 견딜 수 없을만큼 싫어했다. 칼라스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메네기니의 친구에게 메네기니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친구는 메네기니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칼라스에게 다시 다가가줄 것을 요청했지만, 메네기니는 ‘떠난 사람이 먼저 사과하고 돌아와야 한다’며 먼저 손 내미는 것을 거절했다.

     

    만일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자존심을 굽히고 마음 속 진실의 목소리를 따랐더라면 비극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살이냐, 타살이냐’ 논란이 많았지만 칼라스가 떠날 때 적어놓은 ‘라 조콘다’의 싯귀는 자살을 결심하는 극적인 장면을 보여 주는 아리아 가사였다.

     

    “이 끔찍한 순간에/ 내게 남은 건 그대 뿐/ 그대만이 내 마음을 유혹한다/
    그것은 내 운명의 마지막 부름/ 인생의 노상에서 마지막 건너야 할 길...”

     

    수많은 비극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미스테리 속에 세상을 떠난 칼라스.

    마리아칼라스의 유해는 폭풍우가 치는 그리스 반도 앞바다 에게해에 뿌려졌다.

    /박정규 뉴데일리경제 대표(음악평론가)


     

    <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m7yKFQJEavU

    마리아칼라스 '라 트라비아타' 

    <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TYl8GRJGnBY

    마리아칼라스 Casta Diva   

    <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_MrYuebMNmg

    Maria Callas : La Traviata, Norma, Madama Butterfly, Lucia di Lammermoor & many others

    <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xAU67NURHd8

    Tosca, I Vespri Siciliani, La Boheme, La Traviata, Turandot & many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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