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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산책.

관주 觀周 2015. 10. 30. 23:04

 

 

 

창덕궁 후원 산책.

 

 

-. 일시 : 2015.  10. 30.(금)
-. 장소 : 창덕궁 후원, 부용지, 옥류천, 낙선재.
-. 인원 : 재경 청초 47회 동기생  10명.
-. 카메라 :  Canon 5D MK2

 

청초 동기생들과 모처름 뜻깊은 고궁산책을하여서 즐거웠습니다.

우리가 돌아본 창덕궁 후원과 낙선재, 그리고 오찬후 돌아본 운현궁의

간략한 해설을 인터넷에서 모아 편집하여 올리니 한번씩 읽어보기 바람니다.

창덕궁은 자연 지세를 따라 서에서 동으로 파격적인 배치가 돋보이며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궁궐이기도 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20년간 폐허가 되기도 했으나 1610년 광해군이

복구하면서 후원에 소정을 짓고 기화, 이목, 괴석을 모아 화려한 원유를 조성하면서

오늘날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후원(後苑)은 왕의 동산이라는 뜻에서 금원이라 불렀으며 비원(秘苑)이라는 명칭은

일제가 불렀던 용어이다. 자연의 지세를 그대로 살리면서 인위적인 면을

최소화하였던 우리나라 정원의 특징이 가장 잘 반영된 유일한 궁궐후원으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후원 중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 부용지 주변이다.

부용지는 사각형의 연못으로 가운데에는 원형의 인공 섬이 놓여있는데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다" 라는 원리가 투영된 것이다

 

 

 

 

 

 

 

 

 

 

 

 

 

 

 

 

 

 

 

 

 

 

 

 

 

 

 

 

중앙에 큰 4개의 기단 위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는 주합루(宙合樓)는 1층은 왕실 도서관 격인 규장각, 2층은 열람실 겸

누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주합루를 올라가는 초입에는 중앙에 큰 문 하나와 양 옆으로 작은 문이 각각 한 개씩 위치하고 있다.

 

 

중앙의 큰 문은 어수문(魚水門)이라 불리우는데 이는 왕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으로 그 뜻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왕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뜻을 지닌 정조의 민본주의 정치철학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과 주합루, 영화당이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나지막한 구릉의

자연지세와 어우러지게 하는 우리 선조들의 자연관이 가장 잘 드러나는 아름다운 풍광이다.


부용지는 장방형 연못으로 못 가운데에는 직경 9미터의 원형 섬이 조성되어 있다.

원래 이곳에는 숙종 때부터 연못이 있었으며, 1707년 지금의 부용정 터에

택수제가 건립되었던 것을 1792년에 정조가 택수제를 헐고 부용정을 개건한 것이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뉜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창덕궁은 궁궐로서보다는 ‘비원’(秘苑)으로 익숙한 곳이다. 비원이란 창덕궁과

창경궁에 딸린 북쪽의 정원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용어는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주로 후원(後苑)이라 불렀고, 때로는 내원(內苑), 상림원(上林苑),

금원(禁苑)으로 불렀다. 비원이란 말은 1908년부터, 그러니까 일제강점기부터 유포돼

해방 뒤에도 별 반성 없이 최근까지 통용되고 있는 용어일 뿐이다.

창덕궁 후원은 북한산과 응봉에서 뻗어내려 수림이 울창한 자연스런 구릉지대에 점점이 시설물을 설치하여

만든 정원으로 넓이는 약 9만여 평에 이른다. 원래는 창경궁의 후원과 서로 연결되어 구분이 없었으나

일제가 조선 말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조하면서 두 궁궐의 후원에 담장을 쌓아 지금처럼 분리되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 가운데 가장 넓고 경치가 아름다워 일찍부터 왕실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 때문에 여러 왕에 의해 많은 누정이 지어져서 한때 100여 개 이상의 누각과 정자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누각 18채와 정자 22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자연의 구릉과 계곡, 폭포와 숲에 최소한의 인공을 가해 가다듬고 여기에 어울리게 연못, 화계,

취병(翠屛, 꽃나무의 가지를 틀어서 문이나 병풍처럼 만든 것)을 가꾸어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창덕궁 후원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우리 전통 정원을 대표하는 명소이다.

 

 

 

 

옥류천 [玉流川]

창덕궁 후원 북쪽의 깊은 골짜기에 있으며 인조 14년(1636)에 조성하였다.

북악산 동쪽 줄기에서 흐르는 물과 인조가 팠다고 알려진 어정(御井)으로부터 계류가 흐른다.

소요암이라는 널찍한 바위에 U자형 홈을 파고, 샘물을 끌어 올린 다음 작은 폭포처럼 물이

떨어지게 만들었는데 임금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소요암에는 인조가 쓴 옥류천(玉流川)이라는 글씨를 비롯하여 숙종이 지은 시(詩)가

새겨져 있다. 청의정·소요정·태극정·농산정·취한정 등의 정자가 옥류천 옆에 있다.

 

 

 

 


태극정 [太極亭]

창덕궁 후원 옥류천 주변에 있는 정자이다. 인조 14년(1636)에 세웠으며, 원래 운영정(雲影亭)이라

불렀다가 태극정(太極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굴도리를 엮은 정면 1칸·측면 1칸 크기의

겹처마 사각정자이다. 내부에 마루를 깔고 퇴를 달아 평난간을 둘렀다.

 

천정은 우물천정이고, 지붕 꼭대기는 절병통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정조의 ‘태극정시(太極亭詩)’,

숙종의 ‘상림삼정기(上林三亭記)’ 등 태극정을 노래한 어제(御製)가 전해진다.

상림삼정이란 옥류천변의 소요정·청의정·태극정을 일컫는 말이다.

 

후원은 왕과 왕실 사람들의 휴식처였을 뿐 아니라 국왕과 왕자들이 글을 읽고 학문을 연마하거나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던 곳이다. 또 임금이 논밭을 갈고 왕비가 누에를 치는 일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궁궐지』에는 역대 임금이 여기에 있는 누각과 정자 그리고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시와 글,

상량문과 기문들이 수도 없이 나오니, 이곳은 궁중문학의 산실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곳은

정조의 꿈이 서린 곳이었다. 그는 후원에 규장각을 세우고 여러 서고(書庫)를 지어 왕실도서관을

마련하고 규장각 각신들을 길러내어 새로운 정치와 문화를 펼치려고 하였다.

 

 

 

 

 

 

 

 

 

 

 

 

 

 

 

 

 

 

 

 

궁궐 동쪽 끝에는 낙선재라는 소박한 건물이 있다. 낙선재는 헌종이 후궁을 위하여 마련한 공간이다.

헌종은 낙선재를 지은 뒤 옆에 석복헌과 수강재를 추가로 지었고, 이 세 건물이 있는 곳을 통칭하여

낙선재 일곽이라 부르고 있었다. 실용주의자로 검소했던 헌종은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자신의 서재와 사랑채로 사용할 건물에 단청을 생략하였고,

대신 창살과 벽을 아름다운 문양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낙선재 [樂善齋]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八作)기와지붕이며, 누마루가 깔려 있고, 모두 17칸 반의 규모이다. 장대석(長臺石) 위에

초석(礎石)을 놓고, 네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모기둥이며, 기둥 머리에 대들보를 걸었으며, 익공(翼工)을 끼웠다.

누마루 아래에는 아궁이를 내기 위하여 단을 높였고, 아궁이의 벽에는 작은 돌을 불규칙적으로 붙여놓았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안허리의 굽음새도 적당하게 잡혔다. 또한 정면 6칸, 측면 2칸의 석복헌(錫福軒)과 이어져 있다.

 

원래 이곳은 상중(喪中)에 있는 왕후들이 소복(素服) 차림으로 기거하던 곳이며,

1963년 일본에서 돌아온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이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상중에 왕후들이 기거하던 곳이라 하여 단청(丹靑)도 하지 않았다.

 

 

 

 

운현궁

궁궐보다 더 큰 위세를 누렸던 집이다.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고종이 출생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고종은 후사가 없던 철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26대 왕이 되는데 그때 나이가 12세였다.

어린 고종을 대신해 흥선대원군이 조선을 다스리게 되니 이 집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만했다고 한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궁’이라는 이름을 받은 이곳은 점점 그 규모를 늘려가는데 담장의 둘레만도 수 리에

달했다고 하며, 고종이 머물던 창덕궁과의 왕래를 쉬이 하기 위해 운현궁과 이어지는

흥선대원군의 전용문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규모와 위세를 짐작할 수 있겠다.

[

노락당 [老樂堂]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1864년(고종 1)에 건립되었다.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에게 짓게 한

노락당기(老樂堂記)에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 자 다섯 치 밖에 안 된다’라는 내용이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몸채는 정면 10칸·측면 3칸이고 건물 왼쪽으로 1칸, 오른쪽으로 2칸이 더 있으며 남쪽의 행각과도 연결된다.

운현궁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치러졌을 때 가례 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했다고 하며,

잔치 등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삼간택 후 왕비수업을 받은 곳으로 전해진다.

 

 


 

이로당 [二老堂]

노락당과 함께 운현궁의 안채 기능을 담당한 건물로, 1870년(고종 7)에 건립되었다.

남자들이 드나들지 못하는 여자들만의 공간이며, 바깥으로 출입문을 내지 않은 지극히 폐쇄적인

‘口’자형 건물이다. 원래 정면 7칸·측면 7칸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건물 서쪽 부분에

덧붙인 칸으로 인해 정면이 8칸으로 되어 있다. 건물 가운데에는 중정(中庭)이 있다.

운현궁 안살림의 최고 책임자였던 이로당의 안주인은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였다.

 

 

 

 

 

원본이 가지런히 보관되여 있는곳 http://blog.daum.net/afakim/13715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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