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사우회

상반기 문화유적 답사 - 마곡사, 무령왕릉.

관주 觀周 2010. 5. 19. 21:50

    상반기 문화유적 답사 - 마곡사, 무령왕릉.

 

-. 일시 : 2010. 05. 19. 07:30 - 19 : 00   

-. 장소 : 마곡사,  무령왕릉, 공주박물관.

-. 참여인원 : KBS사우회 회원 77명.      

 

 

 

마곡사 (麻谷寺)

충청남도 공주시(公州市) 사곡면(寺谷面) 운암리(雲巖里) 태화산(泰華山) 동쪽 산허리에 위치하는 신라

시대의 절. 25교구본사(敎區本寺)의 하나이다. 마곡사의 사적입안(事蹟立案) 기록에 의하면 640년(선덕

여왕 9)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고려 명종 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수하였고

범일선사(梵日禪師)·각순대사(覺淳大師) 등이 중건하였다.

 

 원(元)나라의 영향을 받은 라마형식의 오층석탑(보물 제799호)과 영산전(靈山殿;보물 제800호)·

대웅보전(大雄寶殿;보물 제801호)·대광보전(大光寶殿;보물 제802호) 등이 있으며, 《감지은니

묘법연화경(紺紙銀泥妙法蓮華經)》 권제1(보물 제269호)·《감지금니묘법연화경(紺紙金泥妙法

蓮華經)》 권제6(보물 제270호) 및 고려시대의 향로가 소장되어 있다.

 

 

마곡사오층석탑 (麻谷寺五層石塔)

 마곡사 경내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 높이 8.7m. 사각형으로 된 화강암석탑으로 2층 기단 위에    

탑신부(塔身部)는 5층이며 꼭대기에 상륜(相輪)을 장식해 놓았다. 탑신부에는 불(佛)·보살(菩薩)

등을 조각하였고 옥개석(屋蓋石) 네 모서리 전각(轉角)에는 풍경을 장식해 놓았으나 현재 모두  

남아 있지 않다.                                                                                                          

 

 탑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은 상륜부인데 <라마탑>을 연상케 하는 청동도금제

(靑銅鍍金製) 이며 국내에서는 유일한 것이다.  훼손되어 보강된 곳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짜임새

있는 석탑이다. 보물 제799호.                                                                

 

 

 마곡사대광보전 (麻谷寺大光寶殿)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단층건물로 자연석 기단 위에 세워진 다포계(多包系) 양식의 팔작(八作)집이다.

기둥에는 현저한 배흘림이 보이고 개구부(開口部)는 앞면 5칸과 양 측면 앞문에만 두고 있다. 공포(拱包)는

기둥 위에 평방(平枋)을 돌리고 내사출목(內四出目)·외삼출목(外三出目) 형식인데, 바깥 살미첨차의 앙설

(仰舌)에는 연봉오리를 조각하였으며 뒷면의 살미첨차는 포개진 교두형(翹頭形)이다.

 

가구(架構)는 무고주(無高柱)·일고주(一高柱)·이고주(二高柱) 형식의 합성으로 다른 건물에 비해

내부공간 처리가 특이하다.  마룻바닥은 우물마루인데, 마루 위에 갈참나무자리를 1장 깐 것도

특이하다. 천장은 2단의 우물천장이며 불단 위에는 꺾임형식의 정교한 닫집을 따로 마련하였다.

 

 

단청은 바깥보다 안쪽이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대들보에는 용(龍)을 그려 넣었다. 건물 내부의

고주(高柱)를 생략함으로써 내부공간을 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구성한 점이 조선시대 건축 중

가장 특이하다. 보물 제802호.                                                                                    

 

 

 마곡사대웅보전 (麻谷寺大雄寶殿)

1.5m 높이의 기단 위에 세워진 중층(重層)의 다포계(多包系) 건물로,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나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줄었다. 내부는 통층(通層)이며, 측면 위층 기둥을 대들보 위에 올려놓은

  것이 특이하고 아래위층 추녀에는 활주(活柱)를 받쳐 놓았다. 아래층 가구(架構)는 내진(內陣)·고주(高柱)

가 앞뒷면의 위층 평주(平柱)가 되어 아래층의 4칸을 위층에서 3칸으로 조절할 수 있어 매우 특이하며,  

 위층 측면기둥은 아래층 양쪽 고주 사이에 끼운 대들보 위에 올려놓았다.                                           

 

 공포(拱包)는 아래위층 모두 안팎 삼출목(三出目)이며 첨차는 모두 조선 초기 양식인 교두(翹頭)인데

살미첨차의 앙설(仰舌) 위에는 중기 양식인 연화(蓮華)를 조각하였다. 마룻바닥은 우물마루로 비교적

 넓고 천장은 우물마루가 위층 대들보에 설치되어 내부공간이 웅장해 보인다. 이 절은 642년(의자왕 2)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1170∼1197년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수

(重修)하고, 범일(梵日)·도설(道說) 등을 거쳐 1650년에 각순대사(覺淳大師)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보물 제801호.

 

 마곡사대광보전 (麻谷寺大光寶殿)

 

 

 마곡사대광보전 (麻谷寺大光寶殿)

 

 

 

 

 

  

오찬은 밤막걸리를 반주로한 올갱이국 백반이 꿀맛!!

 

 

 

 국립 공주 박물관.

 

 

 

 

 무령왕릉 (武寧王陵)

1971년 7월 우연히 발견되어 그 해 10월까지 4차례에 걸친 발굴을 통해 그 전모가 드러났다.

매장주체시설(埋葬主體施設)은 지면 아래에 광을 파고 벽돌[塼(전)]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는데,

널방[墓室(묘실)] 북쪽에 직사각형의 널방[玄室(현실)]과 남쪽벽 중앙에 널길[羨道(연도)]이

부설되어 있고, 천장은 굴 모양으로 되어 있다.

 

 관장식 (국보 154호)

왕의 머리부분에서 거의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다.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문과 화염문 장식을 투조하였는데

문양의 좌우가 비대칭이다. 줄기와 꽃에 지름이 5mm정도인 영락을 달았다. 영락은 둥글고 작은 원판이며

작은 구멍을 뚫어 금실로 꿰어 4~6회 꼬아 달았는데 모두 127개이다. [구당서]에‘(왕은) 검은 천으로

관에 금꽃을 장식하고…’라는 기록으로 보면, 왕릉 출토의 관식은 왕이 평소 사용했던 비단모자의 좌우

혹은 전후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생각된다.

 

 용·봉황을 장식한 큰칼

환두대도는 주로 삼국시대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최고의 신분을나타내는 위세품이며 그 형태나

장식정도, 재질에 따라서 무덤에 묻힌사람의 신분이나 지위의 차이를 나타낸다.무령왕릉 출토 환두

대도는 왕의 좌측에서 발견되었는데, 둥근고리를이루는 손잡이 끝장식 안에 하나의 용을 표현한 단룡문

환두대도이다.환두부는 외부 원과 용모양을 동시에 주조하여 도금한 금동제이다.

 

 받침있는 은잔

동탁은잔은 청동제 받침(동탁)과 은으로 만든 잔(은잔)을 합친 것이다. 받침 은 낮은대각이 달린 접시 모양인데

정 중앙에는 은잔을 받치기 위한 속이 빈 원통형의 받침이 솟아 있다. 여기에 은잔의 굽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걸치게 고안되어 있다. 마치 단아한 산봉우리와 같이 만든 잔 뚜껑에는 산과 산사이의 골짜기에 짐승이 노닐고

있으며, 위로 올라가며 나무가 새겨져 있고 꼭대기에는 연꽃잎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뚜껑 덮힌 잔의 윗부분에는 구름무늬가 부드럽게 표현되었고, 그 밑으로 3 마리의 용이 유유히 날고 있으며,

 이 모두를 연꽃과 고사리 같은 꽃들이 포근하게 감 싸고 있다.

 

 

문화유적답사위원회 허영구 위원장.

 

 무덤의 전체 길이는 7.1m인데, 그 중 널방은 길이 4.2m, 나비 2.7m, 천장 높이 2.9m이다. 축조방법은

벽돌 4개를 포개고, 그 위에 짧은 변을 높이로 세우는 방법을 여러 번 되풀이한 4평 1수(四平一竪)의

방식을 취하였다. 벽면 중간에는 작은 벽감실[壁龕(벽감)]을, 동·서 긴 벽에는 각각 2개, 북쪽 짧은

벽에는 1개의 벽감실을 배치하였고 그 속에 등잔을 넣었다.

 

바닥은 전면널받침[全面棺臺(전면관대)]으로 무늬 없는 벽돌[無紋塼(무문전)]을 삿자리식으로 깔고,

널길 바닥 아래로부터 밖으로 18.7m 정도로 길게 벽돌을 포개어 배수구(排水溝)를 설치하였다. 널방

동쪽에는 왕널[王棺(왕관)]이, 서쪽에는 왕비널[王妃棺(왕비관)]이 머리를 남쪽으로 향한 채 배치

되어 있다.

 

 이처럼 널길 남쪽으로 머리를 둔 예는 별로 발견된 일이 없는데, 풍수지리상의 내룡(來龍) 쪽을 향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매지권(買地券)에 의하면 왕은 523년에 사망하여 525년에 이 능에 안장되었고,

왕비는 526년에 사망하여 529년에 안장되었다. 이로 보아서 왕과 왕비는 모두 사망한 뒤 2년 세월이

경과한 뒤에야 능에 안장되었는데, 이것은 일정기간의 가묘(假墓) 상태에서 다른 곳에 안치하던 투벌

묻기[二次葬法(이차장법)]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왕과 왕비의 왕관을 비롯하여 금팔찌·금귀걸이 등 순금제 3㎏의 정교한 금세공품과 도자기·철기 등

총 88종 2600여 점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또한 왕릉의 구조·지석명문(誌石銘文) 등은 백제 문화의

생생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공산성 [公山城]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사적 제12호. 둘레 2,200m. 웅진성(熊津城)·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했다. 금강에 접한 표고

 110m의 구릉 위에 석축과 토축으로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형(包谷型) 산성이다. 475년 백제 문주왕이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여 538년(성왕 16) 사비(泗沘:지금의 부여)로 옮길 때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축성시기는 국력이 안정된

동성왕 때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시대에 축조된 이래 여러 차례의 개축을 거쳐서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성의 구조는 석축 약 1,810m,

토축 약 390m이다. 석축산성은 안팎으로 돌을 쌓는 협축방식(夾築方式)을 이용했으며, 내탁외축(內托外築)

을 한 부분도 있다. 상단의 너비는 약 70cm 정도이고, 안쪽에는 백회를 발라서 성벽의 석재가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토축산성은 돌을 혼합하여 쌓았는데 대개 높이 1m, 바닥너비 8.5m, 윗면너비 3m 정도이다.    

 

 성내에는 깊이 2m 정도의 호(壕)가 형성되어 있다. 서쪽 성벽은 토축된 위에 돌을 쌓아 축조했다. 성에는

진남루(鎭南樓:南門)·공북루(拱北樓:北門)와 암문(暗門)·치성(雉城)·고대(高臺)·장대(將臺)·수구문(水口

門) 등의 방어시설이 있으며, 동문과 서문의 터가 남아 있다. 1623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

했던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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