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산책 - 창덕궁 [昌德宮] .

-. 일 자 : 2012. 3. 14[수]
-. 참여자 : 이수회 친목회원.
-. 적 요 : 매월 점심모임을 여의도 음식점에서 시행하여 왔으나 오늘은 종로 3가에 있는 영춘옥에서
수육과 소주몇잔, 그리고 설렁탕 한그릇으로 점심을 때우고 창덕궁 문화 산책을 하기로 하였다.
창덕궁[昌德宮]은 조선 시대 궁궐로 동쪽으로 창경궁과 맞닿아 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조선 시대에는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창덕궁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고궁이며, 특히 창덕궁 후원은 한국의 유일한 궁궐
후원이라는 점과 한국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1997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은 고려 시대 궁궐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개성의 송악산의 만월대처럼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에 지어졌다.
보통 궁궐은 인위적으로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내도록 건축되지만 창덕궁은 이러한 얽매임 없이 북악산의 줄기인
응봉의 산자락 생긴 모양에 맞추어 적절하게 궁궐의 기능을 배치하였다.

창덕궁은 정궁인 경복궁보다 오히려 더 많이 쓰인 궁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다시 지어졌고, 1868년 경복궁이 다시
지어질 때까지 경복궁의 역할을 대체하여 임금이 거처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정궁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부분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그린 동궐도와 1900년에 그려진 동궐도형을 참조하여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창덕궁은 태종 5년(1405년)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 있던 고려 궁궐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한 뒤, 재위 3년
(1394년)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이듬해에 조선의 법궁으로 경복궁을 세웠다. 그러나 건국 직후 왕위 계승권
을 둘러싼 왕자와 공신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왕자의 난이 두 차례나 일어나 경복궁의 지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방원이 옹립한 정종은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재위 2년(1400년)에 한양의 지세가 좋지 않다며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그 뒤 정종에게서 양위받은 태종이 재위 5년(1405년)에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고동에 궁궐을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 이름지었다.

인정전(仁政殿) 전경.
'仁政'이란 '어진 정치'를 뜻한다. 인정전 내부인정문(仁政門)을 통해 인정전 마당으로 들어서면 세 단의 월대 위에 서 있는
인정전(仁政殿)이 보인다. 인정전은 태종 5년(1405년)에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세워졌으나 몇 차례 화재가 일어나 다시 지어졌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3년(1803년)에 불탄 것을 이듬해에 다시 지은 것이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로,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는 천장이 높아 통칸으로 트인 1층 건물이다. 인정전은 궁궐에서
으뜸되는 건물로 궁궐의 권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었으므로, 외관이 주는 상징성에 초점이 맞추어 크고 높고
화려하게 지었다.

내부에는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있고, 그 뒤로는 임금이 다스리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가 둘러쳐 있다. 어좌 위에는 보개(寶蓋)라 하여 별도의 천장을 설치하여 어좌의 공간적 차별성을 극대화하였다.
또 인정전의 천장 한가운데는 봉황을 조각하여 이곳이 임금의 공간임을 나타내고 있다. 1908년 무렵에 내부에 서양식 가구와
실내 장식이 도입되어 전돌 바닥 대신 서양식 마루를 깔았고 전등이 설치되었다. 또한 각 창과 문에는 커튼이 달려 있다.
1405년 처음 지어졌다가 1418년 다시 지어졌다. 이 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10년 중건하였으나, 1803년 다시
소실되어 이듬해에 재건하였다.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인정전의 월대를 오르는 계단 중간에는
답도(踏道)라 하여 평평한 돌에 도드라지게 문양을 새겨 장식을 하였다. 답도에는 구름 속을 나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다.
인정전은 월대 위에 서 있으며 봉황이 조각되어 천상의 세계로 묘사되는데, 이는 임금의 신성한 권력을 암시한다.

1408년 태조는 이 궁에서 죽었다. 태종 11년(1411년)에 진선문과 금천교, 이듬해에 돈화문에 이어 여러 전각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창덕궁은 점차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창덕궁은 500여 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한 궁궐이었다. 공식적으로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조선 초기부터 여러 임금이 경복궁을 기피하여 창덕궁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가 많았다. 특히 태종은
왕위를 위해 이복동생을 죽인 곳인데다, 자신의 정적 정도전이 주동하여 건설한 경복궁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낙선재 일대낙선재(樂善齋)는 헌종 13년(1847년)에 중건된 창덕궁의 건물로, 이 일대에는 숙종, 정조, 헌종 때에 지어진
소박한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낙선재는 창덕궁의 동남쪽과 창경궁이 연결되는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데, 궁궐지(宮闕志)
에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로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일기와 낙선재 상량문(上樑文)에는 헌종 13년(1847년)에 낙선당 옛터에
건물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낙선재는 헌종이 후궁이었던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것으로 헌종은 낙선재에서 경빈김씨는
석복헌에 머물렀다고 지내진다. 여기서 낙선재의 의미는 선한일을 즐겨한다는 의미이고 석복헌은 복을 준다는 뜻으로 후사를
기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계후인 순정효황후(윤황후)가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고,
이방자도 이곳에서 살다가 1989년에 죽었다.

낙선재는 세 영역으로 구성되었다. 서쪽에 낙선재가 있고, 그 동쪽에는 낙선재와 건립 시기가 비슷한 석복헌(錫福軒, 1848년 8월 11일 중수)
이 있으며, 다시 그 동쪽으로 1820년대 이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수강재(壽康齋, 1848년 8월 11일 중수)가 있는데, 이 건물들이 있는
영역을 통틀어 흔히 낙선재라고 부른다. 낙선재는 임금이, 석복헌은 왕비가, 수강재는 대비가 거처하던 곳이다.

낙선재는 조선 시대 궁궐의 침전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좌우 대칭의 평면 형식에서 벗어나 온돌과 마루를 생활 방식과 기능에 맞게
구성한 점이 돋보이며, 다양한 외관과 창호 형식, 그리고 후원의 계단식 화단이 빼어나다. 화계 위에는 취운정(翠雲亭), 한정당
(閑靜堂)이 있으며, 그 위에 상량정(上凉亭), 칠분서(七分序), 만월문(滿月門), 삼삼와(三三窩), 승화루(承華樓)와 그 일곽이 있다.

이방자가 세상을 떠난 뒤 낙선자 일곽에 보수와 복원 작업이 이루어져, 1996년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 승화루는 원래
소주합루라 불렀으나 훗날 승화루라고 이름이 바뀌었고 아래는 의신합이라는 방이었으나 현재는 열린 공간이 되어있다.














창덕궁 불로문 [昌德宮 不老門]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세워진 문으로 창덕궁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길에 세워진 돌문이다.
세로판석에 돌쩌귀 자국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나무문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 문을 지나가는 사람은 무병장수한다고 전해진다. ‘궁궐지’에 의하면, 불로문 앞에는
불로지(不老池)라는 연못이 있었고, 그 앞에 불로문이 있어 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창덕궁 연경당 [昌德宮演慶堂]
정면 6칸, 측면 2칸, 단층팔작지붕집. 1828년(순조 28) 진장각(珍藏閣) 옛터에 세워졌다. 사랑채와 안채 모두 납도리집 형식이고,
장설(長舌)도 생략되어 있다. 정간(正間)은 넓고, 앞에는 좁은 툇간(退間)이 놓여 있다. 문은 모두 2분합(二分閤)이고, 대들보와
퇴량(退樑)의 높이는 모두 같으며 대들보 위에는 동자(童子)기둥이 종량(宗樑)을 받았다. 창덕궁에 있는 다른 건물이 단청을 한 데에
비해 연경당은 하지 않았다. 안채와 사랑채가 남향하여 동서로 나란히 있어 딴채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채로 된 집이다.
매우 단촐하고 아담하여 조선시대 사대부의 집 형태를 잘 보여준다.















창덕궁 옥류천 [昌德宮玉流川]
창덕궁 후원 북쪽의 깊은 골짜기에 있으며 인조 14년(1636)에 조성하였다. 북악산 동쪽 줄기에서 흐르는 물과 인조가 팠다고 알려진 어정(御井)
으로부터 계류가 흐른다. 소요암이라는 널찍한 바위에 U자형 홈을 파고, 샘물을 끌어 올린 다음 작은 폭포처럼 물이 떨어지게 만들었는데 임금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소요암에는 인조가 쓴 옥류천(玉流川)이라는 글씨를 비롯하여 숙종이 지은 시(詩)가
새겨져 있다. 청의정·소요정·태극정·농산정·취한정 등의 정자가 옥류천 옆에 있다.



창덕궁 옥류천 [昌德宮玉流川]






문화재 종별 | 지정번호 | 명칭 | 지정일 |
사 적 | 제 122호 | 창 덕 궁 | 1963.1. 18 |
국 보 | 제 225호 | 인 정 전 | 1985. 1. 8 |
보 물 | 제 383호 | 돈 화 문 | 1963. 1. 21 |
제 813호 | 인 정 문 | 1985. 1. 8 |
제 814호 | 선 정 전 | 〃 |
제 815호 | 희 정 당 | 〃 |
제 816호 | 대 조 전 | 〃 |
제 817호 | 구선원전 | 〃 |
제1762호 | 금천교 | 2012.3.2 |
제1763호 | 부용정 | 〃 |
제1764호 | 낙선재 | 〃 |
천연기념물 | 제 194호 | 향 나 무 | 1968. 3. 4 |
제 251호 | 다 래 나 무 | 1975.9. 2 |
제 471호 | 뽕 나 무 | 2006. 4. 6 |
제 472호 | 회 화 나 무 | 2006. 4. 6 |
등록문화재 | 제 240호 | 총 석 정 절 경 도(희정당) | 2006. 3. 2 |
제 241호 | 금강산 만물초승경도(희정당) | 〃 〃 |
제 242호 | 봉 황 도(대조전) |
제 243호 | 백 학 도(대조전) | 〃 |
제 244호 | 조 일 선 관 도(경훈각) | 〃 |
제 245호 | 삼 선 관 파 도(경훈각) | 〃 |


국립국악원-수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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