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월성원자력발전소 견학.

관주 觀周 2011. 12. 2. 06:22

 

 

 

월성원자력발전소 견학.

 

전, 현직 KBS 사우회 임원진이 함께한 월성원자력 발전소 견학팀.

-. 일시 : 2011. 11. 29. - 11. 30.

-. 장소 : 경주 월성원자력 발전소.

-. 인원 : KBS 사우회 전현직 임원 33명.

-. 주관 : 한국원자력 문화재단.

 

현재 280만 KW를 생산하고 있는 월성 원자력 발전기 1, 2, 3, 4호기 전경.

 

2012년 상반기부터 200만KW를 생산할 예정인 신월성 원자력 발전소 건설 현장.

 

경주 월성지역 주행 트랙.

 

 

 

월성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이번 월성원자력발전소 견학의 추진경과및 의미를 설명하는 강회장님.

 

월성원자력 발전소로 가는도중 첫번째 문화탐방 장소인 경주 감은사지[感恩寺址].

 

 

감은사지(感恩寺址) 사적 제31호.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아들인 신문왕이 부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나라를 지키는 사찰로서 682년(신문왕 2)에 완공하였다.

 

삼국사기에 있는 바와 같이, 이 절의 금당(金堂)은 부왕이 죽은 뒤 그 화신인 용이 출입할 수 있도록 신문왕이 건립한 것 같다.

절터는 동해에 이르기 직전의 산기슭에 있는데, 거기에는 큰 3층석탑 2기가 동남으로 흐르는 대종천(大鐘川)을 앞에 두고 서 있다.

 

 

금당터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지표(地表)에는 원형 주좌(柱座)가 각출(刻出)된 1개의 초석이 있고,

곳곳에 사각형 초석(楚石)과 대석(臺石)이 있으며, 금당 마루를 이루었던 장대석 등이 있다.

중문터와 회랑터의 남쪽 절반 및 금당터의 대부분이 밭이 되었고, 회랑터 북쪽 절반과 강당터는 민가에 들어가 있다.

 

 

 

 

 

 

 

 

 

 

 

경주 문무대왕릉 (慶州 文武大王陵)

사적 제158호.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한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文武王)은 통일 후 불안정안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어서도 국가를 지킬 뜻을 가졌다.

그리하여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屍身)을 불식(佛式)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국가를

평안하게 지키도록(護國大龍) 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육지에서 화장하여 동해의 대왕암 일대에 뿌리고 대석(大石)에 장례를 치렀다.

 

 

 

 

이번 행사를 유치하기위하여 동분서주하였던 사우회 홍 부회장님.

 

 

문무대왕능을 미소뛴 모습으로 바라보고계시면서 氣를 받고있는 사우회 강회장님.

 

 

 

 

 

월성 원자력발전소 홍보관 입구에서의 전, 현직 KBS 사우회 임원진.

 

 

 

호기

위치

용량(만kW)

상업운전일(예정일)

월성 1 호기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나아리

67.87

1983.04.22

월성 2 호기

70

1997.07.01

월성 3 호기

70

1998.07.14

월성 4 호기

70

1999.10.01

신월성 1 호기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봉길리

100

(2012)

신월성 2 호기

100

(2012)

 

 

 

 

 

 

 

 

 

 

 

 

 

건설중인 신월성 원자력 발전소 전경. 2기가 건설되고 있는데 기당 100만Kw의 발전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월성원자력 발전소와 가까운 경주시 안남면의 몽돌해수욕장.

 

 

 

 

 

경주 보문단지의 숙소앞 야경.

 

 

APEC 당시 부시 미국 대통령이 경주를 방문했을때 오찬장소였던 대회의실에서 원자력에 관한 특강이 있었다.

 

 

 

 

 

현 경북대학교 원자력학 교수인 강희동씨의 특강.

해박한 지식과 분위기를 휘여잡는 명강의에 두어시간동안 원자력의 세계에 흠뻑빠져들어있다가 나왔다.

 

 

 

 

국보 제29호 에밀레종으로 더잘알려진 성덕대왕신종 (聖德大王神鍾)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1,500여년전 토기입니다. 자세히 보면 재미있는 장면을 볼수 있습니다.

 

 

 

 

 

 

 

 

불국사 다보탑이 경주박물관에 실물크기로 제작된 모조품이 전시되고 있다.

 

 

불국사 석가탑이 경주박물관에 실물크기로 제작된 모조품이 전시되고 있다.

 

 

 

 

 

"천년의 미소"로 더잘 알려진 얼굴무뉘 수막새

미소를 한껏 머금고 있는 이 막새기와는 신라 혹은 경주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1400년전 신라시대에 제작된것으로 알려진 이 기와는 일제강점기 영묘사터에서 나왔다고 전하며 한 일본인이 보관

하다가 1972년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한것이다.

 

에밀레종

 

 

양동 마을.

양동마을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민속마을로 경주에서 형산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20km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 2010년 7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전통 민속마을 중 가장 큰 규모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반촌으로 이 마을은 조선시대 초기에 입향(入鄕)한 이래 손(孫), 이(李) 양성이 서로 협조하며 500여년의 역사를

이어왔으며 지금까지 세거(世居)해온 월성손씨와 여강이씨가 양대문벌을 이루고 있다.

 

 

양동마을에는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5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이를 에워싸고 있는 고즈넉한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 마을들이 산을 뒤로하여 남향받이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으나, 양동마을은

물봉골, 안골, 장터골, 갈곡 등으로 불리는 골짜기를 사이로 하여 구릉의 능선이나 중허리에 가옥들이 들어서 있다. 양동마을의 집들은 대갓집일수록

높고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아래에 직계 또는 방계 후손들의 가옥들이 자리 잡고 있다

 

 

월성손씨의 종가인 서백당과 여강이씨의 종가인 무첨당을 비롯하여 관가정, 향단 등 조선시대 양반주택들과 하인들이 살았던 초가집들,

그리고 이향정, 심수정 등의 정자와 서당인 강학 당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옛 건물들이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민속과 함께 잘 보존되고 있다.

 

 

마을의 지세는 산등성이와 골짜기의 구성이 勿(물)자형으로 작은 산등성이와 골짜기에는 반가(班家)들이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그 아래에는 가람집들이 위치하고 있어 조선시대 신분제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공간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양동마을은 번성 당시의 마을 구성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위치(穴자 형상의 위치)에 배치된 주요 건물들은 모두 보물(무첨당 등 3건) 과

중요민속자료(수졸당 등 11건)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이곳은 중요민속마을 지정 이후 엄격한 고증에 의해 보수·관리되고 있어 본래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국립국악원-수제천

 

 

원본이 있는곳 바로가기 : http://blog.daum.net/afakim/13715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