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연태시 곤륜산

청해진대사 장보고 유적지

관주 觀周 2011. 3. 29. 06:20

                     

청해진대사 장보고 유적지.

 

 

석도의 법화원[法華院] 입구. 

 

중국에서 여행 첫날,  연태 시내를 거처 처음 방문한곳이 산동성 동남쪽에 위해시 석도(石島)이다. 석도는 조용하고 조그만 어촌이라 중국인도 잘 모르는

곳이지만 여행자가 쉬어 가기에는 좋은 곳이며 볼 만한 것으로는 법화원(法華院), 항구, 바닷가로 시내와 주변을 걸어서 둘러보아도 반나절이면 된다.


법화원은 신라장군 장보고가 세운 사찰터에 재건되었으며 주변에는 장보고의 중국진출을 기념하는 탑이 세워져 있고 장보고 기념관과 극락보살계, 영성 민속관,

민간 예술관, 적산서원... 그리고 적산명신 등등을  중국 츠산[斥山] 그룹[集團] 유한 공사에서 3억 위엔을 투자하여 12.8  ㎢ 의 땅에 2003년 5월 개관하였다

석도항은 바로 장보고의 무역선이 출입하는 곳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신라인이 모여 살던 신라방 적산촌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 연태 여행 첫날 3/24일 여행경로.

 

석도의 장보고 유적지가 몰려있는 적산 법화원.

 

 

 

적산 법화원.

1천2백여년 전. 통일신라 흥덕왕(826∼836), 중국은 당[唐]나라 때. 지금의 싼둥[山東]성 동쪽 웨이하이[威海]시. 동남쪽 끝의 롱청[榮成]시

쓰다오[石島]진 적산[赤山]에 청해진 대사 장보고[張保皐]가 세운 절이다. 이름하여 “석도 적산 풍경구[石島 赤山 風景區]”의 "법화원"이다.

 

 

법화원은 당에 거주하는 신라인의 불교 거점인 동시에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기도소였다. 이외에도 신라와의 연락기관

역할을 하였고, 당나라로 건너가는 신라의 승려는 물론 일본의 승려들도 그곳에 묵으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통일 신라 시대에 당(唐)나라의 싼둥반도[山東半島] 등등... 신라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지방에는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으니,

그 곳은 재당 신라인의 무역 활동 거점이며,  신라와의 연락처 구실도 하는 등 당으로 건너가는 승려 및 신라인들의 전진기지가 되였다.

그곳을 신라방[新羅坊]이라 하였고, 거기에 세운 사찰을 신라원[新羅院]이라 하였으며, 정착거류민, 승려 등등이 자치적으로 행정      

관리를 한 기구는 신라소[新羅所]라 칭하였다

 

 관음전 마당의 극락 보살상. - 물과 불을 뿜으며 약 20여분 동안 상단의 극락 보살상이 한바퀴 도는 분수쑈를 한다.

 

 

 

  桃源

 

 餘白 여의산악 대장.

 

笑湖

 

 

 

 

 

 

 

 

 

 應觀

 

 餘白

 

 松巖

 

 桃源

 

 笑湖

 

德山

 

耕雲

 

 

 

십팔 나한상.

좌부터 伏虎,,芭蕉, 托塔,  ?思, 笑獅, 探手, ?耳, 過江, 看門 羅漢. 長眉, 布袋, 靜坐, 開心, 騎象, 喜慶, 擧鉢  , 騎鹿, 降龍 羅漢.

 

 

 

 

 

 

 

 

 

 

 

 

 

삼불보전 아래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공적비.

 

 

 

 

 

중국내에 외국에서 건립한 기념탑은 오직 하나. "장보고기념탑" 김영삼 전대통령이 1994년 방문하여 제막하였다.

 

 

 

이번 여행을 함께한 여행투어 97명이 함께 촬영한 사진인데 마침 정역광이라 얼굴이 모두 검게 나와서 좀 보정후 올린것임을 밝혀둔다.

 

 

 

 

 

 

 

 

 

 장보고의 약력

  출생연도 : 신라 애장왕(AD 800∼809) 시기로 추정      
 출생지 : 완도의 해안지방이라고 추정하고 있음    
그의 이름 : 궁복·궁파 - 한국측 기록, 활을 잘 쏜다는 뜻
                                                               장보고(張保皐) - 중국측 기록, 궁복과 궁파의 중국식 발음에서 온 것으로 추정
                                                                              장보고(張寶高) - 일본측 기록, 재물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추정  
                그의 형제 : 완도에서 같이 자라고 무예를 익힌 고향 아우, 정년     
                             어린시절 : 장보고는 뛰어난 무예와 함께 사람들을 지휘하는 통솔력을 지님
입신 과정 : ① 당나라 무령군 장교로서 반당 세력 토벌
                         ② 신라로 귀국하여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 소탕
                                    ③ 왕위 계승문제에 개입하여 진해장군과 감의군사가 됨  
                 이정기의 관계는? : 장보고는 당나라 무령군의 장교이고 이정기는 반당 번진의 장군임      
     이정기 토벌 후에는?  : 신라에 귀국한다.                                                                
           신라의 해적 피해는? : 해적들은 신라인을 노예로 매매하고, 육지에 상륙하여 민가를 약탈함
  해적의 준동을 본 반응은? : 당의 관직을 버리고 신라로 귀국하여, 흥덕왕에게 청해진 설치 건의
청해진 설치 후에는? : '청해진대사' 되어 해적을 소탕하고 무역에 종사    
             관직은? : ① 중국의 관직 : 무령군중소장                      
  ② 흥덕왕 시기 : 청해진대사
③ 신무왕 시기 : 감의군사 
④ 문성왕 시기 : 진해장군 
그의 중요한 업적은? : ① 민간무역 질서를 태동시켜 9C 동아시아 사회의 질적 변화를 이끔
                 ② 청해진을 설치하고 동아시아의 해상교통로를 발전시킴
③ 이슬람 세계와의 교역 확대                    
    개인적 능력은? : 그는 의롭고 포용력이 강하며 뛰어난 통솔력과 용병술의 소유자로 무역, 외교에 능숙
암살 동기는? : 장보고 세력이 확대되고 그의 딸을 통해 중앙 정계로 진출되면서
신라 귀족들이

                                   정치적 위협을 느꼈고, 장보고에게 흡수된 군소 무역업자들의 반발등으로 살해됨

 

청해진대사 장보고 동상앞에서의 여의산악회 회원.

 

장보고대사의 초상화.

 

 

 

 

 

 

 

 

 

 

 

 

 

 

 

 

 

 

 

 

 

적산법화원의 적산명신(赤山明神)

산 정상에는 동상 높이 58.8m에 달하는 적산명신(赤山明神)상이 있다. 적산명신이 누군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리고 있지만

 9세기 일본 승려 엔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근거로 장보고의 현신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여의산악회 산악대장 餘白

 

 

 

 

 

觀主

 

 

 

 

 

법화원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세운 석패방.   문이 다섯이면 황궁에만 세우는것인데, 그만큼 중요하고 권위가 있다는 뜻 ?

 

 

중국땅에 남은 우리 선조의 발자취를 찾아 본다는것은 분명 해볼만한 일이며 보람이있고, 흥분을 감출 수가 없을것이다.

그러나,  신라 사람들이 살았다는 신라방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수 없고, 자치기구로 영사관 구실을 했을 신라소도 찾을 길이 없다.

 

완전하게 중국화 된 법화원, 그들의 취향에 따라 포장 재생되어 오히려 쓸쓸하고 서운함으로 느껴짐은 나만의 느낌일가 ?  

법화원을 거니는 내내 씁쓰레한 뒷맛이 머릿속을 꽉 메워 반가워야할 선조들의 발자취를 보는것이 무척이나 답답하게 느껴진다.

 

좌로부터 觀主, 여행투어 대표 백사장님, 여의산악대장 餘白  

 

 

陽春白雪

원본이 가지런히 보관되여 있는곳 http://blog.daum.net/afakim/13715116